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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교도소 유골 262구, 제주 4·3 희생자 가능성 커"
기사 작성일 : 2024-10-23 14:00:30

(제주= 변지철 기자 = 5년 전 옛 광주교도소에서 발견된 유골이 제주4·3 당시 광주로 끌려간 4·3 희생자일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기자회견하는 양동윤 제주4·3도민연대 대표


(제주= 변지철 기자 =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23일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광주교도소 신원미상 유해 262구와 광주형무소 4·3희생자와의 관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은 기자회견 하는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 모습. 2024.10.23

제주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이하 4·3도민연대)는 23일 제주도의회 도민카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4·3도민연대에 따르면 2019년 12월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공동묘지 합장묘역의 합장묘 1기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8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이 합장묘는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에 있던 옛 광주형무소가 1971년 4월 21일 광주 북구 문흥동 옛 광주교도소로 이전하는 과정에 조성됐다.

유골 역시 옛 광주형무소에 있던 무연고자 유해를 합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애초 41구가 안치됐다는 기록과 달리 80여구의 유골이 나왔는데 40구는 땅속 박스형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다른 40여구는 구조물 위 합장묘 봉분 흙더미 속에서 발견됐다.

광주교도소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의 암매장지로 지목된 만큼 바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정밀감식이 진행됐다.


[그래픽] 기록없는 유골 발견된 옛 광주교도소 무연고자 합장묘


[ 자료사진]

2000년 6월 국과수가 1차 유골 분류작업을 한 결과 발견된 유골은 80여구가 아닌 261구로 추정됐고, 나중에 262구로 최종 확인됐다.

유골의 연령대는 어린애부터 60∼70대 남녀까지 다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5·18 행방불명자 가족의 혈액을 채취해 DNA 대조했지만 연관성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해당 유골은 제주4·3 당시 광주로 끌려간 4·3 희생자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고 관련 조사가 이어졌다.

한국전쟁 당시 광주형무소 재소자 좌익사범 3천여명은 광주광역시 북구 장구봉 등 5곳의 학살지에서 총살됐지만 광주형무소 내 학살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재소자 중 옥사 사례 등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4·3 당시 광주형무소에 수감된 제주 사람들은 광주지방법원 판결문 목록에서 179명이 확인된다. 이 중 140여명은 한국전쟁 직후 복역 중에 광주형무소 인근 야산 등지에서 총살됐다.

당시 판결문 목록에서 확인된 제주 사람 중에는 광주형무소 복역 중 옥사하거나 사망 후에 '공소기각' 판결받은 4·3 관련 재소자도 15명이 있다.


신원미상 유골 발굴된 옛 광주교도소


[ 자료사진]

또 1명은 제주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망했지만, 나중에 공소기각 판결받아 사후에 판결기록된 경우도 있다.

제주도는 옛 광주형무소에서 발견된 262구의 유골 유전자 정보를 5·18기념재단 등으로부터 넘겨받아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소에서 제주4·3 유가족 DNA와 대조하는 등의 신원 확인 절차를 밟고 있다.

양동윤 4·3도민연대 대표는 "(판결문 기록에) 광주형무소에서 수감된 제주 사람이 179명으로 확인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제주도민이 광주형무소에서 희생됐을 것으로 보인다"며 "5·18 당시 행방불명된 사람의 유해와 관련성이 없는 만큼 제주 4·3 희생자 유해가 광주형무소 내 무연고자 합장묘에 묻혔을 개연성이 매우 크다"고 강조했다.

제주4·3특별법에 의하면 제주4·3은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 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고를 계기로 저항과 탄압, 1948년 4월 3일의 봉기에서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의 해제 시까지 무력 충돌과 공권력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민간인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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