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올해는 멕시코 한인 이민 12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1905년 5월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1천31명은 에네켄(애니깽) 농장에서 4년 안팎의 시간을 보낸 뒤 뿔뿔이 흩어져 현지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현재 멕시코에는 3만여명의 후손이 살고 있습니다. 는 멕시코 한인 이민사 조망, 주멕시코 한국대사 인터뷰, 진입장벽 높은 멕시코 테킬라 시장 진출로 보는 현지 안착 사례 등 기획 기사 3편을 송고합니다.]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멕시코시티= 이재림 특파원 = 120년 전 한국인에게 멕시코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와 부족한 먹거리로 곤궁에 빠졌던 선조들의 눈에 '묵서가'(墨西哥·멕시코를 뜻하는 한자어) 근로자를 모집하는 언론 광고는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문구로 채워졌다.
'4년 계약. 주택 무료 임대. 높은 임금'이라는 조건의 초대장을 손에 쥔 1천33명은 그렇게 멕시코 첫 한인 이주민으로서 1905년 4월 4일 인천 제물포항에서 영국 상선 일포드호에 몸을 실었다.
일본 요코하마를 거친 일포드호는 출항 한 달여 뒤 멕시코 오악사카(와하까) 살리나크루스항에 닻을 내렸다.
그간 아이 2명과 어른 1명이 숨지고 아이 1명이 태어나 1천31명이 뭍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들은 곧바로 기차와 배로 이동해 유카탄 프로그레소항으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10∼25명씩 무리로 나뉘어 메리다의 에네켄 농장에 배치됐다.
에네켄은 날카로운 잎을 가진 선인장의 일종이다. 에네켄은 당시 수요가 많았던 선박용 로프의 재료였다.
한인들은 이르면 오전 4시부터 일몰 때까지, 여름 한낮 기온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 속에서 에네켄 잎을 자르고 섬유질을 벗겨냈다.
얼굴이 검게 타고, 가시에 찔려 손에서 피가 나기 일쑤였다. 임금 체불에 임대주택과 식량도 직접 구입해야 했다는 게 당시 상황을 연구한 역사가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황성신문은 1905년 7월 29일자 사설에서 "조각난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는다", "한국 여인들의 처량한 모습은 가축같이 보이는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실정", "농노들의 그 비참한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도다" 등과 같은 비탄 섞인 글로 당시 한인들의 처참한 일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멕시코 메리다시 소재 한인이민사박물관
[한인이민사박물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계약 기간 종료 뒤에도 이주민들은 일제 치하에 놓인 고국에 돌아가기 어려웠고, 대부분 멕시코 전역으로 흩어져 정착하는 삶을 택했다. 일부는 멕시코 주민과 결혼하며 현지화했다.
1세대 이주 한인 중 270여명은 1921년 쿠바 사탕수수 농장으로도 넘어갔다. 이들은 현재 아바나와 마탄사스 등지에 사는 한국계 1천100여명의 선조다.
멕시코 이주 한인들은 '고생을 대물림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실현하고 정체성 수호를 위해 한글학교를 설립해 직접 아이들을 가르친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해 모국에 보내기도 했다.
옛 국가보훈처(국가보훈부)에서 발행한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조사 보고서: 멕시코, 쿠바'를 보면 유카탄반도 한인들은 농장 계약 만료를 앞두고 대한인국민회의 메리다 지방회를 설립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했다.
무관 양성기관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세워 군인을 양성하기도 했다.
현재 멕시코에는 이들의 후손 3만여명이 살고 있다. 세대를 거듭하며 외모나 언어는 현지화했으나, 한인후손회를 조직해 활동하거나 한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즐기며 뿌리를 기억하고 있다.
2022년 멕시코시티 시내에 걸린 '한인 후손' 다큐멘터리 홍보물
[촬영 이재림 특파원]
2022년 '데센디엔테스(Descendientes. 후손이라는 뜻의 스페인어) 후손'이라는 제목의 23분 분량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던 멜리사 몬드라곤 감독은 와의 인터뷰에서 "후손들은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매우 다른 나라를 배경으로 성장했다고 봐야 한다"며 "한인 후손들이 선조의 슬픔을 공유하며 멕시코 내 공동체로 자리 잡은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현재 후손들은 5세대까지 이어졌다고 한인후손회는 전했다. 3·4세 후손 중에는 상원 의원(노라 유)과 주 대법원장(리스베스 로이 송)을 지낸 사례도 있다.
후손들은 한국 사회와 더 다양한 방식으로 교류하며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각종 동포 간담회에 적극적으로 참석하며 후손들의 바람을 전달하는 마르타 김 멕시코시티 한인후손회장(전문의)은 "선조들의 희생을 기리고 후손들이 더 단합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후손들은 특히 한국 문화에 대한 현지인의 높은 관심을 기반으로 양국 간 교류가 더 활발해지기를 기대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분석 자료를 보면 중남미 지역 콘텐츠 시장은 2021년 이후 6년간 연평균 예상 성장률(6.63%)이 전 세계 평균 예상 성장률(5.19%)을 웃돌 것으로 관측됐는데, 특히 멕시코 내 한국 문화 소비 의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주멕시코 한국문화원, 과달라하라 도서전서 한국 문학 홍보
[ 자료사진. 주멕시코 한국문화원 제공]
주멕시코 한국대사관은 올해 한인 이주 120주년 기념사업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재외동포청과 국가보훈부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또 한편으로는 한인 후손에 대한 전수 현황 조사를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할 방침이다.
현지에서는 한국이민사박물관이 있는 유카탄주 메리다를 비롯해 캄페체주 캄페체가 5월 4일을 '한국의 날'로 지정해 기리고 있다. 유카탄주 정부 차원에서도 같은 날을 '한국의 날'로 기념한다.
2021년에는 멕시코 연방의회가 특정 국가 기념일로는 최초로 '한인 이민자의 날'을 지정했다.
이처럼 멕시코에선 이주 120주년을 맞이한 한국인들의 족적을 기리고, 한국과의 교류와 협력을 증진하려는 노력이 한 해 동안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