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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사상검증이라는 '유령'
기사 작성일 : 2025-02-11 16:00:33

인권위에 모인 윤 대통령 지지자들


김인철 기자 =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10일 서울 중구 인권위에서 열리는 '2025년 제2차 전윈위원회'를 앞두고 로비에 모여있다. 2025.2.10 [공동취재]

최재석 선임기자 = 17세기 일본의 천주교 박해를 다룬 작품 '사일런스'란 영화가 있다. 이 영화에는 에도 막부 시절 가톨릭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했던 '후미에'라는 판이 등장한다.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이 십자가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후미에를 밟고 지나가면 목숨만은 건지지만 거부하면 처형된다. 자신의 양심을 드러내도록 강요받는 과정에서 사람의 인격은 철저히 파괴된다. 이런 행위는 지금도 '십자가 밟기'라는 용어로 통용된다.

'12·3 비상계엄' 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에 참여했던 가수 이승환 씨의 경북 구미시 공연이 취소된 일과 관련해서도 이 용어가 등장했다. 구미시는 이씨에게 공연에 앞서 '정치적 선동 및 오해 등의 언행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요청했으나 이씨 측이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공연장 대관이 취소됐다. 이에 이씨는 "제 공연이 정치적 목적의 행사는 아니었기에 지금까지 대관에는 문제가 없었다"며 "2024년 12월 한 음악인은 공연 직전 '십자가 밟기'를 강요당했고, 그 자체가 부당하기에 거부했다"고 밝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10일 윤 대통령의 탄핵 심판 방어권 보장 등을 골자로 한 권고안을 의결하는 과정에서 '사상검증' 논란이 일었다. 일부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이날 오전부터 인권위 회의장으로 가는 건물 14층 길목을 막아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상대로 사상검증을 하겠다며 '시진핑 개XX, 김일성 개XX라고 말해봐라' '이재명 욕 해봐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이들은 오후 2시께 경찰에 의해 해산됐지만 아무 자격이나 권한이 없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한동안 국가기관 건물을 점거하는 초법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 사회는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려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계엄 이후 탄핵정국에서 정치권의 탄핵 찬반 선동이 이를 더욱 부추기는 꼴이다. 어느 편인지 선택을 강요하고, 강요된 선택에 따라 내편 네편을 갈라 서로 적대시해서야 건강한 민주사회라고 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는 수많은 차이가 공존하며 각축하는 다양성의 공간이며, 그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민주적 의사소통이 출발한다고 한다.

해방 후 지리산 산골 마을에서는 밤낮으로 '주인'이 바뀌었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통제권을 행사했다. 새벽녘에 누군가가 집에 들이닥쳐 총부리를 겨누며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일이 적잖다. 어스름한 빛 때문에 도대체 국군인지, 빨치산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한순간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던 공포의 시대를 우린 겪었다. 극심한 좌우 대립과 남북 분단으로 이어진 우리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겼던 사상검증이라는 '유령'이 언제까지 우리 사회를 맴돌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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