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공중전화. 2021년
[ 자료사진]
심재훈 기자 = 거리를 지나다 보면 우체통과 함께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제는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공용 시설이 있다. 바로 공중전화다.
1980~90년대만 해도 공중전화부스에 길게 늘어선 대기 행렬뿐만 아니라 앞사람이 전화를 오래 건다고 시비가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2000년대 들어 인기가 시들해진 공중전화는 최근에는 사용하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지면서 존재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
그렇다면 거리에서 공중전화부스는 앞으로 사라지게 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중전화는 국민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필수 서비스로 법상 규정돼있어 관련법이 폐지되지 않은 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공중전화 이용자가 거의 없고 KT 입장에서도 수익이 나지 않기 때문에 통신 3사가 비용을 분담해 최소한의 공중전화만 유지하고 있으며 이 또한 줄어드는 추세다.
◇ 공중전화, 국민 필수통신에서 거리 애물단지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화가 개통된 날은 1896년 10월 2일이었다. 당시 전화는 '텔레폰'(telephone)을 음역해 '덕률풍'(德律風)이라고 부르거나, '말 전하는 기계'라는 뜻으로 '전어기'(傳語機)라고 불렀다.
1903년에는 서울 마포-도동(남대문)-시흥(영등포)-경교(서대문) 등에 초기 공중전화라고 할 수 있는 '전화소'가 등장했다. 전화소는 1910년대 초 무인 부스에 동전을 넣어 사용하는 '자동전화'로 변신했다가 1927년 '공중전화'로 개명됐다.
전화를 걸거나 받으려면 다방에 가야 했던 1950년대를 거쳐 1962년 9월 시청 앞과 화신백화점 앞 등 서울 시내 10곳에 '옥외 무인' 공중전화가 등장했다.
1975년 공중전화 부스
장거리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시민들-70년대 공중전화 부스,관리책임자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씌여 있다.2004.4.21.<저작권자 ⓒ 2004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1986년부터는 카드 공중전화가 보급되기 시작됐다. 1990년 8월에는 서울의 한 공중전화부스에서 전화를 빨리 끊으라고 재촉하는 사람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을 정도로 공중전화는 시민의 삶 그 자체였다.
1990년대 주말 번화가에서는 삐삐(무선호철기)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공중전화 부스 앞에 긴 줄이 늘어섰으며, 대도시 터미널 앞 광장에는 보통 10대 묶음의 공중전화가 설치돼있었다. 서울역과 용산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공중전화 사용량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휴대전화 붐과 함께 공중전화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99년 56만대를 넘었던 공중전화는 2008년 3월에는 18만대, 2018년 5만9천여대, 2019년 4만6천여대, 2020년 3만9천여대, 2021년 3만5천여대, 2022년 2만8천여대, 2023년 2만4천900여대로 매년 줄어들며 사실상 '길거리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한민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KT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기준 공중전화 총설치 대수는 2만4천982대였다. 공중전화 1대당 월평균 이용 건수는 30.8건이고 월평균 통화량은 25.7분이었다. 공중전화 1대당 하루 평균 1명이 1분 미만으로 이용하는 셈이었다.
1990년대 일반적인 공중전화 풍경. 1995년
[kt 링커스 제공]
이처럼 공중전화 이용이 줄면서 공중전화를 운영하는 KT의 2021년 수익은 영업수익 163억원, 영업비용 300억원으로 영업손실이 137억원에 달했다. 공중전화 관련 영업손실은 2018년 184억원, 2019년 168억원, 2020년 140억원으로 조금씩 감소하는 추세다.
◇ 법상 공중전화 없앨 순 없어…국민 보편 서비스
누구나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는 현재는 공중전화가 사실상 쓸모가 없어졌지만 법 때문에 공중전화가 사라지긴 어렵다.
전기통신사업법에는 공중전화를 국민에게 제공하는 기본적인 서비스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보편적 역무' 개념으로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적절한 요금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원칙이다.
이 법은 통신사업자의 의무도 규정하고 있는데 KT와 같은 통신사업자에게 공중전화 운영에 대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어, 수익성과 관계없이 공중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고 유지해야 하며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바로 서비스를 종료할 수는 없다.
또한, 무선 통신망이 단절되는 재해·재난 그리고 전시 상황 등 비상시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공중전화가 필요하다. 기지국·중계기 등 시설에 피해가 발생하거나 전파 교란·간섭 등으로 통신이 끊길 위험이 큰 무선 통신망에 비해 유선 통신망인 공중전화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며 유사시에도 연락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의 공중전화 박스
서울역 앞의 공중전화 박스. 1993.11.(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2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2018년 11월 서울 KT 아현지사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서울 여러 지역에서 휴대전화를 포함한 무선망 서비스가 마비되는 상황 속에서도 일부 공중전화는 원활한 통신을 제공해 공중전화의 필요성이 부각된 바 있다.
이런 법적 보호로 인해 공중전화는 이용률 감소에도 유지되고 있지만, 효율적인 운영을 위해 공중전화 설치 대수는 점진적으로 줄고 있으며 기존 부스를 다양한 용도로 하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외국의 경우 2022년 5월 뉴욕에 있던 마지막 공중전화 부스가 철거됐다. 관광객을 위한 전시 목적으로 남겨둔 전화부스 4곳을 제외하고는 뉴욕에서 공중전화 부스는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미국의 경우 2000년에 200만대 이상이었던 공중전화가 2016년에는 10만대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1992년 시카고에서는 마약 거래 증가에 대한 우려로 공중전화를 금지하자는 여론까지 일면서 공중전화가 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주기도 했다.
서울 세종로 공중전화
조보희 기자 = 서울 세종로변에 있는 공중전화. 휴대폰에 밀려 사용자가 거의 없는 공중전화는 비상시에 대비해 시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23.7.24
영국에서는 상징적인 빨간색 공중전화부스를 포함해 이미 수만 대의 공중전화가 철거됐다.
일본은 우리나라와 유사하게 보편적 서비스 정책의 일환으로 공중전화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 NTT가 제공하는 '제1종 공중전화'는 사회생활의 안전성과 가정 밖에서 최소한의 통화 수단을 확보한다는 취지로 사용 빈도와 상관없이 유지되고 있다.
프랑스는 공중전화 유지에 대해 선별적인 접근법을 택하고 있다. 반드시 유지할 공중전화를 선별하거나 운영 대수를 지정해 이에 부합하는 공중전화의 손실만을 보전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길거리에 사실상 방치된 공중전화 부스를 처리하기 위해 스위스에서는 2018년 개인에게 공중전화 부스를 판매했다. 스위스에서 공중전화는 보편적 서비스라는 취지로 스위스컴이 의무적으로 유지해왔는데, 2018년부터 유지관리 의무 대상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2004년부터 2016년까지 스위스에서 공중전화 사용 건수는 95% 감소했다.
◇ 사건·사고 끊이지 않은 공중전화…범죄 단서 되기도
공중전화는 한때 일상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다양한 사건, 사고의 배경이 됐다.
1990년 8월에 20대 청년이 공중전화를 사용하던 중 뒤에서 기다리던 여성이 통화를 빨리 끝내달라고 요청하자 가지고 있던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공중전화 이용 수요가 높아 대기 시간이 길어지면서 발생한 사회적 문제였다.
1992년에는 공중전화 부스의 유리창이 깨지거나 전화기가 파손되는 사례가 빈번했다. 한 해 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파손 건수는 47만여 건에 이르렀으며 수리 비용만 18억원으로, 이는 공중전화 1천800대를 새로 설치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불량 동전을 사용해 공중전화가 고장 나는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쓴 돈을 빼내기 위해 실을 달아놓은 동전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공중전화부스에 갇히는 사고도 적지 않았다. 1990년대에는 남성이 술을 마신 후 공중전화부스에 갇혀 119와 경찰에 신고해 장난 전화로 오인하는 사례도 있었다. 공중전화부스에 갇힌 사람이 수십 년 만에 초등학교 동창에게 구해달라고 연락해 상대방이 당황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중전화
[촬영 이상학]
2004년 경기도 양평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서는 공중전화가 결정적인 단서로 활용됐다.
수사팀은 피해자와 연관된 사람들의 휴대전화로 걸려 온 공중전화 통화 내용을 분석해 특정 공중전화에서 연속으로 걸린 전화번호들을 추적해 용의자의 흔적을 찾아갔다. 한 달 이상 난항을 겪던 수사는 공중전화 통화 명세 리스트에 있던 한 여성의 제보로 용의자를 체포하는 데 극적으로 성공했다. 이는 공중전화가 범죄 수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010-4444-4444'라는 전화번호와 관련된 도시 전설도 있다. 2009년 4월까지 이 번호로 전화를 걸면 보이스웨어 준우의 음성으로 녹음된 귀신 이야기가 무작위로 재생돼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2년 9월 광주에서는 연쇄 방화 사건의 용의자가 공중전화를 이용해 경찰에 연락했다가 체포됐다. 이 용의자는 주차된 차들에 불을 지르고 도주한 혐의가 있었는데 경찰에 "왜 나를 찾느냐"며 공중전화를 걸어 항의하자, 경찰은 통화를 이어가며 용의자의 위치를 파악해 현장에서 체포했다.
공중전화부스가 범죄에 이용된 사례도 있다. 2024년 1월 대구에서 한 60대 남성이 공중전화로 특정 정치인을 위협하는 전화를 걸었다가 경찰에 체포됐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인천에서 공중전화부스를 마약 거래의 은닉 장소로 활용한 60대 남성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 변신하는 공중전화…배터리 충전소 역할까지
구로전화국 앞 전기오토바이 배터리 교환형 충전소
[서울시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공중전화는 휴대전화 보급 확대로 이용이 급감했지만 법적 의무와 공익성으로 인해 완전한 폐지는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이에 따라 KT는 손실을 줄이면서도 공익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자체 및 기업 등과 함께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서울시는 2022년에 발표한 대기질 개선 종합대책 '더 맑은 서울 2030' 계획을 통해 2025년까지 서울 전역에 공중전화부스를 활용한 배터리 교환형 충전소 3천기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아울러 서울시는 2025년까지 공중전화부스를 활용한 전기 오토바이 충전소 1천 곳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번에 설치하는 충전소는 전기 오토바이의 방전된 배터리를 완충된 배터리로 교체할 수 있는 배터리 교환형 충전소다. 사용자 인증부터 배터리 교체까지 1분 안에 가능하게 설계됐다.
2021년 KT 링커스는 폐기 예정인 공중전화 부스를 1인용 사무공간 '아라부스'로 활용하는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아라부스는 기가 인터넷망과 고속 충전 서비스를 제공해 사용자가 업무를 하거나 영화를 시청하고 스트리밍 게임을 즐길 수 있다.
IBK기업은행은 노후 공중전화 부스를 리모델링해 자동화기기(ATM)를 설치하는 '길거리 점포화' 사업을 추진해 2017년 기존 공중전화부스 3칸을 고쳐 2칸에 ATM을 설치했고 나머지 1칸에는 공중전화와 자동심장충격기를 들여놓기도 했다.
2016년에는 KT링커스가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과 함께 서울·성남·대구·순천 지역 공중전화부스에 전기차 급속충전기 9기를 설치하고 급속 충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공중전화부스 안에 책이 있네'
이지은 기자 = 서울 성동구 왕립리역 앞 광장에 위치한 책뜨락에서 한 어린이와 엄마가 책을 보고 있다. 2012.3.7
2015년에는 수원시 한 주민센터는 주민들이 손쉽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KT에서 철거할 예정인 공중전화부스를 기증받아 작은 도서관으로 개조한 뒤 도서를 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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