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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샷!] '목사방'·JMS…무서운 '가스라이팅'
기사 작성일 : 2025-02-14 06:00:30

영화 '가스등' 포스터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캡처. DB 및 재판매 금지]

이승연 기자 = 최근 법무부가 심리적 지배 관계 속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 하면서 '가스라이팅'의 위험성이 부각됐다.

가스라이팅은 피해자가 스스로 심리적 지배 상태에 놓였다는 것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가해자는 교묘하게 피해자의 현실 인식을 흔들고 점진적으로 정신을 통제한다.

외관상 위력이나 협박이 존재하지 않지만, 상대방의 사고방식과 감정을 조종해 가해자의 지배하에 놓이는 심리적 학대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영화 '가스등' 스틸컷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캡처. DB 및 재판매 금지]

◇ 종교지도자·신도, 환자·간병인 등 친밀·의존 관계서 발생

가스라이팅이라는 용어는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의 희곡 '가스등'(Gaslight)에서 유래했다.

1944년 잉그리드 버그만 주연 동명 영화로 이어진 '가스등'에서 남편 '그레고리'는 아내 '폴라'를 심리적으로 조종하기 위해 집 안의 가스등을 조작하고 불빛이 어두워지는 것이 마치 폴라의 착각인 듯 속인다.

그레고리는 교묘한 속임수와 상황 조작을 통해 폴라의 현실 감각을 흔들어 놓는다. 예를 들어 폴라에게 브로치를 선물한 후 몰래 훔쳐 감춘 뒤 마치 폴라가 브로치를 잃어버린 것처럼 만든다. 또 방 안의 그림을 치운 뒤 폴라가 그림을 숨겼다고 뒤집어씌우며 그녀가 환각을 보고 있다고 몰아간다.

이에 폴라는 점차 자신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처럼 가스라이팅은 장기간에 걸쳐 상대방을 심리적으로 지배해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가해자의 의도대로 행동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주로 가족, 친구, 연인 등 친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이거나 환자와 간병인, 종교지도자와 신도 등 한쪽이 강하게 의존하는 관계에서 발생한다.

가스라이팅 개념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0년대 중후반부터다.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트럼프 대통령이 보였던 행보를 보도하는 과정에서 자주 노출되기 시작했다.

미국 언어연구회는 '가스라이팅'을 2016년 가장 많이 사용된 신조어로 선정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는 2018년 '가스라이팅'을 그 해 가장 인기있는 신조어 중 하나로 선정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시기 트럼프 보도와 함께 미투(Me too) 운동을 통해 가스라이팅 개념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JMS 정명석 17년형 선고 관련 소회 밝히는 메이플


임화영 기자 = 기독교복음선교회(통칭 JMS) 총재 정명석의 여신도 성폭행 피해자인 메이플 씨가 지난 1월 9일 오후 서울 서초구 한국콘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정명석에 대한 대법원 17년형 선고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소회를 밝히고 있다. 2025.2.14.

◇ '목사방'·JMS 정명석 사건서도 '심리적 지배'가 핵심

국내에서는 심리적 지배가 범죄로 이어진 사건이 잇따르면서 '가스라이팅'의 위험성이 주목받고 있다.

최근 텔레그램에서 '자경단'이라는 이름으로 사이버 성폭력 범죄집단을 꾸린 총책 김녹완 사건이 대표적이다. 김녹완은 협박과 심리적 지배를 통해 남녀 234명을 성착취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스스로 '목사'라 칭한 김녹완은 한 시간마다 일상을 보고하고 반성문을 작성하도록 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이를 어기면 벌을 준다는 명목으로 나체 촬영 및 자해 등 가학적 성착취 행위를 강요해 피해자들의 심리를 지배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유죄 확정된 기독교복음선교회(통칭 JMS) 총재 정명석 사건도 가스라이팅이 판결 쟁점이었다. 정씨는 충남 금산군에 위치한 수련원 등에서 여신도들을 성추행한 혐의로 징역 17년을 선고 받았다.

법원은 종교적으로 세뇌된 피해자들이 심리적으로 항거불능 상태에 놓였다고 보고 정씨의 혐의를 전부 인정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피고인의 성적 행위를 종교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믿었거나 적어도 그에 대한 판단과 결정을 하지 못하는 정신적 혼란 상태에 있었다"고 밝혔다.

가스라이팅을 통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르거나, 피해자가 살인하도록 종용할 수도 있다.

지난 11일 광주고법은 피해자들을 심리적으로 지배해 폭행을 유도, 살인을 저지르도록 한 혐의를 받는 이모(33)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씨는 작년 7월 전남 여수시 자동차전용도로 졸음쉼터에서 B(사망당시 31세)씨와 C(31)씨를 차량에 한 달가량 가둔 뒤 서로를 폭행하게 해, B씨가 숨지고 C씨가 크게 다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자경단' 총책 김녹완의 머그샷


텔레그램에서 '자경단'이라는 이름의 사이버 성폭력 범죄집단을 꾸려 약 5년간 남녀 234명을 성착취한 김녹완(33)의 신상이 공개됐다. 서울경찰청은 지난 8일 누리집에 김씨의 이름, 나이, 사진을 공개했다. 이 정보는 내달 10일까지 약 한 달간 공개된다. 2025.2.14 [서울경찰청 제공. 재판매 및 DB금지]

◇ 민법 개정안에 '부당위압' 법리 도입…법적 보호 확대 기대

법무부는 1958년 제정 이후 67년간 큰 틀을 유지해온 민법의 전면 개정에 나서면서 지난 7일 가스라이팅에 의한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된 민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는 미국, 영국 등 국가가 채택하는 '부당위압' 법리를 도입한 것이다.

심리적으로 취약한 상태인 자가 특정인에게 심리적으로 강하게 의존하고 있거나 그와 긴밀한 신뢰 관계에 있는 경우 그 영향으로 부당한 간섭에 의한 의사표시를 했을 때 취소할 수 있게 하겠다는 내용이다.

그간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재산을 빼앗기거나 불리한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민법상 이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조항이 없어 피해자들은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현행 민법 110조는 사기, 강박에 의한 의사표시만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지은 경북대 로스쿨 조교수는 지난해 발표한 논문을 통해 "현대사회는 급속한 고령화로 말미암아 신체적·정신적 취약성으로 인해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노출될 위험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기나 강박의 수단으로서 위협, 압박은 매우 교묘해지고 지능적 방법으로 이뤄지고 있어 현행 민법상 의사표시에 관한 규율 등만으로는 부당위압이 문제 되는 사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부당위압 법리 도입을 통해 "가족관계, 요부조자(도움이 필요한 사람)와 간병인 등 신뢰관계에 기초한 부당한 영향력 사례뿐 아니라 현대에 이르러 계약 체결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주 활용되는 수단 등에도 폭넓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조항을 적용할 수 있는 사례로는 집요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텔레마케팅, 다단계와 같은 집단적 분위기를 조성한 거래 유도 등이 제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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