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회 연단에서 내려오는 바르니에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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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하원이 예산안을 둘러싼 갈등 상황에서 끝내 미셸 바르니에 정부를 무너뜨리면서 프랑스 정국이 소용돌이에 빠지게 됐다.
프랑스 하원은 4일(현지시간) 저녁 바르니에 정부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해 찬성 331표로 가결했다.
바르니에 정부에 참여한 범여권과 우파 공화당을 제외하고 야당, 즉 좌파 연합과 극우 진영이 정치적 스펙트럼의 차이를 뛰어넘어 사실상 한뜻으로 정부 몰아내기에 성공한 셈이다.
바르니에 총리는 지난 2일 정부의 책임하에 하원 표결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헌법 제49조3항을 발동해 예산안 가운데 사회보장 재정 법안을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좌파와 극우 진영이 반발하며 각각 정부 불신임안을 발의했다.
바르니에 정부가 하원의 벽에 부딪혀 붕괴하면서 헌법 조항을 써 채택하려던 사회보장 재정 법안 처리도 물거품이 됐다.
이 밖에 재정 법안 등 다른 예산안의 처리도 불투명해졌다.
정부 공백 상태에서는 예산안 처리가 어렵다고 프랑스 법학자들은 설명한다.
릴 대학의 오렐리앙 보두 공법 교수는 앞서 일간 르몽드에 "바르니에 정부가 붕괴하면 정부는 더 이상 새로운 법안을 추진할 권한이 없으며 단지 '일상적인 업무 처리'만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르니에 정부의 장관들이 총사퇴하더라도 후임들이 정해질 때까지는 일상적인 업무를 처리할 수 있지만 기존에 논의해 온 예산안을 추진하거나 새로운 예산안을 제출할 수는 없다는 취지다.
만약 이달 31일까지 예산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공무원 급여 지급이나 국가 공급업체에 결제 대금을 지불할 수 없게 되고 공공 서비스 운영 역시 중단된다. 즉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공 행정이 마비되는 '셧다운'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바르니에 총리(왼)와 마크롱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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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태를 막을 방법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신속히 새 총리를 임명해 새 정부를 꾸리는 방안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국가의 정상적인 작동을 위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후임 총리를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며칠 전부터 프랑스 언론들은 마크롱 대통령이 바르니에 정부의 운명을 직감하고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정 인물들의 이름까지 거론됐다.
일부 소식통은 7일로 예정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 전에 새 총리를 임명하는 게 마크롱 대통령의 목표라고 로이터 통신에 전했다.
이날 기념식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 등 50여개국 지도자가 참석할 예정이라 그 전에 온전한 정부의 틀을 갖추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다만 마크롱 대통령의 후임 총리 지명은 또 다른 정치적 진통을 낳을 것으로 보인다.
바르니에 정부를 끌어내린 좌파 진영은 당장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좌파 총리를 임명하라"고 압박하고 나섰다.
올리비에 포르 사회당 대표는 프랑스2 방송에 출연해 "우리는 이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단순히 정부 불신임만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며 마크롱 대통령을 향해 "좌파 총리를 임명하라는 프랑스 국민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극좌 정당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도 엑스(X·옛 트위터)에 "마크롱은 바르니에 같은 총리를 3개월마다 교체해서는 남은 3년을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바르니에 총리 때와 같은 선택을 한다면 또다시 정부를 무너뜨리겠다는 경고다.
하원에서 정부 불신임안 토론 듣는 장뤼크 멜랑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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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영의 인물이 총리로 임명되든 새 정부는 곧바로 예산안을 의회에 다시 제출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 심사 과정을 거치면 올해 안에 예산안이 처리될 가능성은 사실상 희박하다.
이 경우 정부는 재정법 관련 조항에 따라 우선 올해 예산을 내년까지 연장하는 특별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내년도 예산안이 처리될 때까지 올해 예산안으로 긴급한 경우만 막는 방법이다.
물론 이 특별법안도 의회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상황에까지 몰려 '셧다운' 위기가 현실화하면 마크롱 대통령은 헌법 16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비상 권한을 발동할 수 있다.
이 조항은 국가의 독립이나 영토 보전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경우뿐 아니라 공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 대통령이 특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규정한다.
프랑스 대통령이 이 권한을 행사하려면 헌법위원회, 상·하원 의장과 공식 협의를 거쳐야 한다.
프랑스 5공화국 역사상 대통령이 헌법 16조를 발동한 적은 딱 한 차례, 1961년 샤를 드골 대통령이 알제리 위기 당시 사용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발동 요건이 까다롭고 정치적 후폭풍이 만만치 않아 대통령들이 쉽게 행사할 수 없는 권한이란 뜻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5일 밤 8시 대국민 연설을 한다.
야당은 이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마크롱 대통령에게 있다며 그의 사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대통령직을 흔들림 없이 수행할 뜻을 밝히며 정국 안정을 위한 대국민 메시지를 전할 것으로 보인다.
마크롱 대통령이 어떤 대책을 내놓든 정부 붕괴에 따른 정치적 혼돈과 국가적 위기는 당분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