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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파기 앞장선 日의원에게 찾아가"…김태지 전 주일대사 별세
기사 작성일 : 2025-01-17 19:01:11


[유족 제공]

김지연 이충원 기자 = 1960년 한일회담 업무에 차출된 것을 시작으로 1998년 주일 대사를 마칠 때까지 38년간 한일 외교 중심에서 활약한 김태지(金太智) 전 주일 대사가 지난 16일 오후 1시23분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17일 전했다. 향년 90세.

제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법대 재학 중인 1956년 고등고시 행정과 3부(외교)에 합격, 1959∼1998년 외무부에서만 39년간 근무했다. 그중 25년은 해외 공관에서 일했고, 1975년 오트볼타 대사대리를 시작으로 1981년 홍콩 총영사, 1984년 뉴욕 총영사, 1987년 인도 대사, 1993년 독일 대사, 1995∼1998년 일본 대사를 맡는 등 6개 공관장을 역임했다. 퇴임 후에는 한화그룹 고문,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대책반 자문위원, 아주대 초빙교수, 국회 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 등으로 일했다.

외교관 생활 내내 한일 외교 업무를 맡았다. 1960년 4·19 혁명 후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한일회담 업무에 차출된 것을 시작으로 1964년 아주국 동북아과 서기관 때에는 한일 기본관계와 청구권 문제를 맡아 한일교섭에 참가했다. 당시 한일합병조약이 언제 무효가 됐는지를 두고 양국이 협상을 벌이는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했다. 일본 측은 처음엔 한일합병조약이 무효라는 걸 조문에 명기하는 데 부정적이었지만, 한국 측의 설득 끝에 조문화하고 무효 앞에 '이미(already)'라는 표현을 붙이는 데 동의했다.

1967년 주일대사관 1등서기관(정무과장)을 맡았고, 공관에 있다가 본부에 들어갈 때마다 동북아과장, 아주국장 등을 맡으며 일본 전문가로 활약했다. 아주국장일 때는 1965년에 맺은 한일어업협정을 개정, 1980년 잠정 협정을 타결했다. 일본 대사 임기 막판인 1998년 1월 일본 측이 어업협정을 파기한 탓에 소환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당시 주일 대사관 참사관으로 고인과 함께 일한 이준규 전 주일 대사는 "일본 측이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할 때 주도한 게 사토 고코(1928∼2011) 자민당 의원이었는데, 고인이 사토 의원에게 찾아가서 '당신이 협정 파기에 앞장섰으니 결자해지로 교섭도 주도해달라'고 설득하던 게 기억이 난다"며 "나중에 신협정이 타결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일본 측이 양보하자고 주장했던 게 사토 의원이었다"고 회상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에 대한 일본 내 반대를 무마하려고 애썼다. 자민당 보수파의 핵심이었던 하시모토 류타로(1937∼2006)를 만나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언론에서 '불 끄는 소방수'라는 평을 들었다.

오트볼타 대사대리 때는 비동맹 국가들이 유엔에 가입하고 북한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해 가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유엔 표결 시 기권을 끌어냈다. 독일 대사 시절에는 정계 은퇴 선언을 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을 만나 한일관계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다.

2017년에 나온 국립외교원의 외교관 구술서 머리말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북 인식이나 통일정책에는 극히 비판적이었지만 대일정책은 매우 적절했다고 본다"며 "아직도 과거사가 미래지향적인 한일 양국 관계의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준규 전 대사는 "인품이 훌륭하고 부하들을 덕으로 이끄는 분이라서 좋아하는 후배들이 많았다"고 기억했다.

유족은 부인 정경임씨와 2남(김동위·김동언) 등이 있다. 빈소는 수원요양병원 장례식장 3호실, 발인 19일 오전 7시, 장지 이천 에덴낙원. ☎ 031-640-9797

※ 부고 게재 문의는 팩스 02-398-3111, 전화 02-398-3000, 카톡 okjebo, 이메일 유족 연락처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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