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좌에 돌아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 . 재판매 및 DB 금지]
임화섭 기자 = 도널드 트럼프 제47대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 직후 자국 중심 일방주의 정책들을 연쇄적으로 발표하면서, 80년간 유지돼 온 지구촌의 미국 주도 다자주의 체계가 붕괴 위기를 맞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파리기후협약 재탈퇴와 세계보건기구(WHO) 탈퇴를 선언하는 한편, 대외 원조를 전면 중단하고 90일간 재검토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다국적기업들의 세금 회피를 방지하기 위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글로벌 최저한세' 합의에 대해서도 미국 의회의 입법 조치가 없으면 미국 내에서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또 북미 3개국 간 자유무역협정인 USMCA를 미국과 맺은 멕시코와 캐나다 양국에 대해 25% 관세 부과 조치를 2월 1일에 하려고 한다고도 밝혔다.
즉각 탈퇴나 파기 선언은 아니지만, 미국이 체결한 기존 무역협정들을 재검토하고 필요하면 개정을 추진하라는 지시를 트럼프가 취임 당일에 내린 점도 일방주의적 대외정책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45대 대통령으로 재직한 집권 1기(2017∼2021년)에도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을 외치며 다자주의 체제에 공격을 가했다.
파리기후협약,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유네스코(UNESCO), 이란 핵 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유엔인권이사회(UNHRC), WHO 등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복원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버린 TPP와 JCPOA를 제외하고 유엔 산하 기구들과의 협력, 파리 기후변화협약에는 재가입이나 탈퇴 철회의 형식으로 복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 조치의 배경에는 미국만 손해를 본다는 다자주의 체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불신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관측이 일반적이다.
그는 미국이 자국 이익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글로벌 난제에 개입하는 것을 꺼리는 고립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굳이 개입한다면 그에 걸맞은 거래적 이익이 있어야 한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 1기부터 노출해온 기조였다.
그는 이날 취임식 연설에서도 서두부터 "우리가 (다른 나라에)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며 변하지 않은 소신을 피력했다.
트럼프 1기 4년간 약화했던 미국 주도 글로벌 다자주의 체계는 바이든 집권기 4년을 거치면서 일단 회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단기적 국익을 내세운 더 강력한 선택적 고립주의로 무장한 트럼프 2기 집권을 계기로 결국 붕괴의 길을 걸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다시 제기된다.
유엔과 그 산하기관들을 중심으로 한 현행 글로벌 다자체계의 틀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미국이 압도적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연합국의 주도권을 쥔 상태에서 만들어졌다.
이 체제는 제2 세계대전 이후 40여년간 미국과 소련의 '양극 체제'로 유지되다가 옛 소련이 1991년 말 멸망한 후부터는 사실상 미국 1극 체제로 운영돼왔다.
그러나 최근 10여년간 미국과 중국 사이의 갈등이 노골화되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연합(EU)과 간접적 군사 대결을 벌이는 등 세계정세가 불안정해지고 다극화되면서 글로벌 다자체계의 현실 문제 해결 능력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트럼프는 집권 1기 때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를 중심으로 한 군사 분야나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세계무역기구(WTO) 등 경제 분야의 주요 다자간 국제기구에서는 탈퇴를 심각하게 추진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들 기관 상당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으며, 진담은 아닌 것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나토나 WTO에서 탈퇴할 가능성을 거론한 적도 있다.
군사나 경제 분야에서마저 미국 중심의 글로벌 다자주의 체계가 흔들리는 일이 트럼프 집권 2기에 현실화하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미국 의회는 2024 회계연도 국방예산안을 2023년 12월에 통과시키면서 대통령이 미국을 나토에서 마음대로 탈퇴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 조항을 포함했다.
해당 조항에는 대통령이 미국을 나토에서 탈퇴시키려면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나 혹은 상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트럼프가 이를 무시하고 탈퇴 선언을 하거나, 실질적으로 나토의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도록 하는 방식 등으로 나토를 무력화할 가능성은 남아 있다.
미국 의회는 미국 대통령의 일방적 나토 탈퇴를 막을 조항을 법률에 명기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으로 전해진다.
현실화하진 않더라도 과거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리스크를 느끼게 됐다는 것 자체가 상황의 심각성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