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지지자에게 습격당한 서부지법
신현우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되자 지지자들이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방법원을 습격한 19일 오전 서부지법 창과 외벽 등이 파손돼 있다. 2025.1.19
구정모 기자 =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 발부 결정에 반발한 지지자들이 해당 법원을 습격해 난동을 벌인 사태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법부의 중심인 법원이 무분별한 폭력행위로 '무법지대'로 전락한 사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면 법원이나 판사들이 판결과 관련해 수난을 당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 1958년 '조봉암 판결 불만' 청년들 대법원 난입
과거 신문 검색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법원 수난 사례는 1958년 7월 5일에 발생한 이른바 반공청년들의 대법원 습격 사건이다.
1958년 7월 6일자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은 일단의 청년들이 법원 청내에까지 밀려들면서 '담당 판사의 타도'를 부르짖는 등 과격한 시위운동을 전개해 일대 소동을 일으킨 사태가 어제 재판소 앞뜰에서 벌어졌다.
유례없는 이 '판결 거역 시위'는 '반공청년회'의 이름으로 '진보당사건' 담당 판사에게로 공격의 화살을 집중시켰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날 재판소 청내는 사무 일체가 거의 마비 상태에 빠진 가운데 '사법권 독립에의 일대 위협'이라는 법원 직원들의 탄식까지 자아내게 했다."
이 사건은 조봉암 선생과 진보당 사건이라는 역사적 맥락에 놓여 있다.
조봉암 선생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약 216만표를 얻어 당시 이승만 대통령(505만표)의 가장 큰 정적으로 부상했다.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이후 2년 뒤인 1958년, 조 선생과 그가 만든 진보당 관계자들은 간첩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죽산 조봉암, 52년만에 간첩 혐의 무죄
[ 자료사진]
이 사건을 맡았던 서울지방법원의 부장판사는 그해 7월 2일 조 선생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해 징역 5년을 선고하고, 간첩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인정했다.
그러자 선고 사흘 뒤인 7월 5일 반공청년 200~300여명이 지프차에 스피커를 매달고 대법원을 난입해 '진보당 사건판결 규탄 반공청년 궐기대회'를 열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 있던 치안국 간부가 제지하려 하자 이들은 "너 무어냐", "비켜"라며 밀어제치는 등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고 했다.
일부 언론에선 이들 반공청년이 정치깡패 이정재의 하수인들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저서 '사법부-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2016)에서 "시위대가 판결에 불만을 품고 대법원 청사에 난입한 것은 정부 수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이 난동이 가져온 압박의 효과는 확실했다. 사건 발생 두 달 후 2심에서 조 선생에게 사형이 선고됐고, 이듬해인 1959년 2월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조 선생은 그해 7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반세기 남짓 만인 2011년 1월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간첩 누명을 벗었다.
◇ 승려들이 대법원 판결에 할복…400명 몰려가
1960년 11월 24일엔 승려들이 대법원에 난입했다. 이른바 '6비구 할복' 사건이다.
당시 불교계는 출가 후 독신으로 사는 비구파와 살림을 차리고 자식도 두는 대처승파가 교단 운영을 두고 법적 분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당일 대법원이 비구 측 패소 취지의 판결을 하자 이에 반발한 비구 6명이 대법원장 비서실을 찾아가 칼로 할복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들이 칼로 자기의 배를 약 3∼4㎝ 찔렀다.
대법원
신현우 기자 = 사진은 대법원 모습. 2025.1.20
경찰이 이들을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게 해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비구와 비구니 400명이 대법원 청사로 몰려와 소동을 벌여, 비구와 비구니 300여명이 경찰에 연행됐고, 이들 중 24명은 특수건조물침입과 특수공무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 됐다.
이후 불교계는 1962년 통합 종단을 출범시키고 승려 자격을 출가 독신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 무장군인, 법원 난입에 판사 집까지 들이닥쳐
1964년 5월 21일엔 무장군인들이 법원에 들이닥쳤다. 1964년 5월 22일자 조선일보는 1면에서 '무장군인 10여명 법원에 난입, 압력'이라는 헤드라인으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카빈과 권총을 휴대한 무장군인이 집단으로 법원에 난입하고 영장 담당 판사를 자택으로 찾아가 약 2시간이나 5·20 데모 학생들의 영장 발부에 압력을 가하는 등 우리 헌정사상 일찍이 없던 중대 사건이 21일 새벽에 일어났다."
6.3항쟁 당시 대학생들
사진은 1964년 6.3항쟁 당시 한일협상 반대와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 시위를 벌이는 건국대 학생들 모습. 2016.5.8 [건국대학교 제공]
이 사건은 '6·3 항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한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한일회담을 재개했는데,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이를 '굴욕외교'라고 비판하며 1964년 3월 6일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꾸려 본격적인 반대 운동에 나섰다.
대학생들도 3월 24일부터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벌였고, 5월 20일엔 서울대에서 대학생 2천명가량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했다. 민족적 민주주의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주장하던 민주주의 모델을 말한다.
이 시위로 학생과 시민들이 대거 붙잡혔는데 서울형사지법의 영장 담당 판사가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 대부분을 기각했다.
이 결정 후 3시간여 후인 21일 새벽 4시30분께 육군 공수단 소속 군인 13명이 무장한 채로 서울형사지법에 난입해 영장을 기각한 판사를 수소문해 자리에 없는 것을 확인하자 판사의 집에까지 들이닥쳤다.
동아일보는 5월 22일자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야당 의원의 발언을 빌려 '국기 흔드는 난동'이라고 달았다. 이 사건이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에도 한일회담 반대 운동은 계속됐고, 6월 3일엔 서울 시내에만 대학생 1만2천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인 '6·3 항쟁'이 발발했다.
◇ 대학생들 검찰청·법원서 화염병 던지며 폭력시위
1980년대 법원 난입의 '주인공'은 대학생들이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대학생들의 주된 목표는 검찰청이었고, 법원은 '부수적 피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다.
지방에서 검찰청과 법원이 한데 모여 있는 까닭에 대학생들이 검찰청에 난입해 폭력시위를 벌이면 그 피해가 법원에까지 미칠 수 있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1988년 12월 24일자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광주지검 검사장은 전남대와 조선대 총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전남대와 조선대생들이 11월 3일 이후 4차례나 검찰과 법원 청사를 기습했다며 이런 행동을 하지 않도록 지도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사장은 법원 청사도 함께 언급했지만 각 사례를 보면 검찰청이 대학생들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1월 3일에 전남대·조선대생들이 광주지검 청사 옥상에 올라가 '전두환·이순자 구속'을 외치다가 붙잡혔다.
12월 2일엔 광주지검으로 몰려와 '전두환·이순자 구속 처단'을 요구하며 쇠 파이프로 청사 본관 정문의 대형 유리창을 깨고 화염병 50여개를 던지고 달아났다.
법원이 구체적으로 거론된 것은 12월 18일 시위 때였다. 당시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조선대생 100여명이 광주지검과 지법 앞에 몰려와 화염병 100여개와 돌멩이 등을 던지며 시위를 벌였다. 또한 쇠 파이프와 각목 등을 휘둘러 지검 청사 유리창 30여장, 지법 유리창 20여장과 승용차 유리창을 파손했다.
역대 대통령 전두환
2000.2.2 (본사자료) <저작권자 ⓒ 2000 연 합 뉴 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대학생들의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의 시위는 5공 비리 청문회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제6공화국이 들어선 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비리와 부정부패를 수사하라는 요구가 거세게 일었다.
대학생들도 1988년 전국 각지에서 이른바 '전두환 이순자 체포 결사대'를 조직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광주지검과 지법에서 일어난 폭력행위도 이런 대학생들 시위의 연장선상이었다.
국회도 이런 국민적 요구에 따라 5공 비리 청문회를 열어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정경 유착, 비자금 조성 등의 실태를 밝혀냈다.
결국 전두환 전 대통령은 그해 11월 대국민 사과를 하고 부인과 함께 강원도 사찰인 백담사로 들어가 한동안 은둔생활을 했다.
대학생들의 법원 난입은 이듬해에도 있었다. 이번에도 지검에서 지법으로 번지는 양상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조선대, 전남대 등 대학생 500여명이 광주지검 청사에 들어가 '이철규 씨 사인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화염병과 돈을 던지는 등의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대학생 4명이 광주지법 건물 3층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지검과 지법 유리창 50여장이 깨지고 승용차 2대가 불에 탔다.
◇ 1980년대 이후 법원 난동 없어…판사 겨냥 테러는 발생
1980년대 이후로는 누군가 집단으로 법원 내부로 들어가 난동은 벌인 사례를 찾기 어렵다.
다만 이번 서부지법 난동을 예고했다고 볼 수 있는 사건이 없지 않았다.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을 인용하는 결정을 한 직후 헌재 인근에서 벌어진 시위가 그 사례다.
헌재의 결정 소식에 흥분한 탄핵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헌재 쪽으로 진출하려다가 이를 막는 경찰과 충돌했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만 4명 발생했다. 이 가운데 70대 참가자는 경찰 소음관리 차량에서 떨어진 철제 스피커에 맞아 숨졌다.
판결 앞둔 '판사테러' 김명호씨
서명곤기자 = 현직 고법 부장판사를 석궁으로 쏴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김명호씨가 판결을 앞두고 있다. 사진은 지난 1월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송파경찰서를 나서 차량해 탑승한
법원이 아닌 판사 개인에 대한 테러도 적지 않았다. 이른바 '석궁 테러'가 21세기 대표 사례다.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가 복직 소송의 항소심 재판부가 패소 판결을 하자 2007년 1월 당시 부장판사를 향해 석궁으로 화살을 쐈다. 김 전 교수는 이 일로 징역 4년의 실형을 확정받았다.
하지만 김 전 교수는 석궁을 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부러진 화살'이 흥행에 성공하며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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