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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학생운동 대명사…김중태 전 6·3동지회장 별세
기사 작성일 : 2025-01-07 10:00:34

2013년 국민대통합위원회 부위원장 임명장 수여식 당시의 고인


[촬영 임헌정]

이충원 기자 =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도, 1960년대 학생운동의 대명사로 꼽히는 김중태(金重泰) 전 6·3동지회장이 지난 6일 오전 5시께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5세.

1940년 7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경북 의성에서 자란 고인은 서울대 정치학과(61학번)에 다니던 1964년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 2대 회장, 한일 굴욕 외교 반대 전국 대학생 투쟁위원장 등을 맡아 6·3항쟁(1964년 6월3일 서울대 문리대생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벌어진 한일회담 반대 시위)을 주도했다. 김지하(1941∼2022) 시인이 유명한 조사(弔詞)를 남긴 1964년 5월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도 이때 벌어졌다. 권근술(1941∼2020), 성유보(1943∼2014), 이부영, 김학준씨가 고인과 정치학과 동기였고, 김도현 전 문화체육부 차관과 현승일 전 국민대 총장은 1년 선배였다.

고인은 1964년 6월3일 서울대 문리대 교정에 모인 서울 시내 학생 1만여명 앞에서 "나는 (경찰에 자수해서) 들어가서 당당하게 조사를 받겠으니 여러분은 끝까지 투쟁하라"고 독려했다. 그날 오후 광화문, 서울역 일대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학생 수만 명과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잠적했던 고인이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단식농성 현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다룬 1964년 6월3일자 동아일보 기사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이후 '1차 인민혁명당 사건', 1·2차 민비연 사건,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등에 연루돼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했다. 1967년 신민당 운영위원을 잠시 맡은 뒤 1969년 김형욱(1925∼1979) 중앙정보부장의 강요로 도미해 일리노이주립대에서 공부하고, 뉴스쿨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 서거 다음 해인 1980년 귀국했지만, 1983년까지 정치정화법 탓에 해외여행이 금지되고 주거지도 제한됐다. 13∼1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005년 교육방송(EBS)이 방영한 1960년대 대학생들의 생활을 다룬 논픽션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 실제 모델이 고인이었다.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 한국 고대사 연구에 관심을 쏟아 책 '원효결서'(1997)를 펴냈다.

유족은 부인과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1호실, 발인 8일 오후 2시. ☎ 02-2072-2032

※ 부고 게재 문의는 팩스 02-398-3111, 전화 02-398-3000, 카톡 okjebo, 이메일 유족 연락처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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