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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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박성민 특파원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3일(현지시간) 멕시코를 향한 '관세 폭탄'을 한 달간 유예한다고 밝힌 것은 일단 멕시코가 마약 및 불법 이민자 유입을 선제 차단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지난 1일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뿐 아니라 캐나다, 중국에 고율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을 두고 미국 내에서 '경제 악영향'을 내세워 거센 반발이 이어진 점도 관세 시행을 일단 미루고 협상에 나서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일 멕시코에 대해 25%의 전면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서명한 행정명령을 보면 그는 멕시코와 접한 남부 국경에서 "불법 이민자와 불법 마약성 진통제 및 기타 약물의 지속적 유입이 미국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갱 조직원, 밀수업자, 인신매매범, 온갖 종류의 불법 마약이 국경을 넘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미국의 치안과 공중보건에 막대한 위해를 끼쳤다는 게 트럼프 대통령의 인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특히 멕시코의 마약 밀수 조직(DTO)이 다국적 카르텔과 협력·공모해 비밀 활주로, 해상 항로, 터널, 육로 등을 통해 인간 운반책을 이용해 미국으로 마약을 유입시키고, 이들 DTO가 멕시코 정부와 '묵과하기 어려운'(intolerable)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고 비판했다.
멕시코 정부가 미국의 안전을 위협하는 범죄 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충분한 관심과 자원을 투입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부추겼다는 것이다.
이에 클라우디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은 이날 오전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좀비 마약'으로 불리는 펜타닐 등 마약과 불법 이민자를 선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멕시코 군 병력 1만명을 국경에 투입하겠다고 약속하며 '성의'를 보였고, 이를 트럼프 대통령이 수용하면서 전격적인 관세 유예 조처가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앞서 케빈 해셋 미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도 이날 C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결정은 '관세 전쟁'이 아닌 '마약 전쟁'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국과의 통상이나 교역 이슈보다는 마약 유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세 부과를 택했다는 설명인 셈이다.
그는 또한 주말 동안 멕시코와 대화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며 대(對)멕시코 관세가 철회 혹은 유예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 서명 이후 언론을 비롯해 미국내 여론이 거센 비판을 쏟아낸 것도 관세 보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보수 성향 경제지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캐나다·멕시코에 대한 관세 부과 결정에 "아무런 이유가 없다"며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무역 전쟁"이라고 비난했고, 뉴욕타임스(NYT)는 "트럼프에게 관세는 그 자체가 목적이며, '도금시대'(Gilded Age·1865년 남북전쟁 후 미국에서 자본주의가 급속히 발전한 28년간의 시대)의 비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입원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번 관세 부과가 미국 내 물가를 올려 소비자들에게 큰 부담을 지울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지면서 코로나19 사태 이후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불안과 우려를 가중시킨 바 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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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가 이처럼 관세 폭탄을 저지하고 협상을 할 수 있는 한 달의 시간을 번 반면, 멕시코와 똑같이 4일부터 25% 관세를 부과 당할 처지에 놓인 캐나다의 경우 아직 '관세 위기'를 해소하지 못한 상황이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이날 오전 셰인바움 멕시코 대통령보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를 했는데도 멕시코처럼 관세 유예 조치를 끌어내지는 못한 것이다.
이에 두 정상은 미 동부시간으로 이날 오후 3시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이때 트뤼도 총리가 멕시코 사례를 참고해 미국으로의 마약·불법 이민자 유입 차단을 위해 국경에서 더욱 강경한 조처를 제시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에 만족한다면 멕시코처럼 '관세 유예 후 협상'을 받아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급한 불을 끄고서 한 달의 시간을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추후 협상 과정이 녹록지는 않을 전망이다.
한 달간 국경에서의 선제적 차단 노력이 실질적 효과를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고, 미국 측에서 마약이나 불법 이민자 문제뿐 아니라 막대한 무역적자 해소라는 통상 이슈를 본격적으로 들고 나올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셰인바움 대통령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과의 통화에서 '미국의 대(對)멕시코 무역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해 (멕시코가) 노력해야 한다'는 의중을 밝혔다고 전한 바 있다.
캐나다 역시 대미 무역흑자를 보고 있어서 국경 보안 강화 문제만 해결한다고 관세 위협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뤼도 총리와의 통화 내용을 전하는 트루스소셜 글에서 "캐나다는 심지어 미국 은행이 그곳에서 개점하거나 영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며 "그것과 다른 많은 것들은 다 왜 그러는 것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다.